“박해 가운데서 사명 다하도록 기도해 주세요”
워가집회에서 눈이 반짝거리는 한 여성을 만났다. 다음은 그녀의 아름다운 간증이다. 초대교회사 같은 상황 속에서도 그녀가 보여준 당당함, 흔들리지 않는 여유 그리고 따스함, 이 모든 것들이 워가집회가 끝난 다음에도 기자의 가슴속에 남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까리스(가명)입니다. 저는 11년 전에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어느날 저의 친척이 저에게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때 저는 화를 내며 "예수에 대해 그만 말해"라며 문을 쾅 닫고 나왔습니다. 저녁이 되었는데 저의 머리 속에서 자꾸 친척에게 들은 복음이 생각났습니다. "왜 예수님일까?"라는 의문과 저의 친척의 달라진 모습- 얼굴 빛, 가난함에서 벗어남 등등- 이 저의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6개월 후 저는 그녀를 보고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해 얘기해 달라고 했습니다. "진짜 복음을 듣고 싶은 거야?" 라며 그녀는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로부터 딱 1주일이 지났을 때입니다. 저의 꿈은 영어교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 주위에는 외국인 친구가 많아 그들과 함께 영어로 얘기하며 영어를 배울 수 있었으나 저는 자격증이 필요했습니다. 대학에 입학을 하려고 할 때 입니다. 제가 가고 싶어하는 학교에 있는데 예수님께서 저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아름다우셨습니다.
"네가 왜 여기에 왔느냐? 너는 여기 오면 안 된단다."
"예수님 저는 영어를 배워야만 해요."
"너는 영어를 잘 하지 않느냐?"
저는 깜짝 놀라서 "저는 자격증이 필요해요. 영어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그건 네 할 일이 아니다. 너는 사람들의 목자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의 목자요?"
저는 너무 놀랐고 당황했습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의 목자가 뭘 의미하는 지도,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저는 성경을 읽고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우크레이나에서 온 목사님들이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시킨에서 성경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저의 사랑 제 남편을 만났습니다. 저의 남편은 감옥에서 예수 영화를 보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복음을 받아들인 방법을 이용하여 복음을 전할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을 모아 우리말로 영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막달리나 영화를 우즈메키스탄 언어와 카라칼박 언어로 번역할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가정에도 변화를 주셨습니다. 저의 가정은 부모님과 언니 둘, 남동생 둘 여동생 셋 그리고 저 이렇게 열 식구가 삽니다. 저의 집은 대부분의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처럼 무슬림이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제가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저를 때렸습니다. 그 후로 3년간 저와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저의 아빠를 사랑합니다. 지금은 저의 아버지만 빼고는 모두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저의 동생들은 저와 제 남편을 돕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저는 계속해서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워가로 부르셨습니다. 저는 여기서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워가 삼일째 (수요일)에 저에게 예수님께서 예전에 꾼 꿈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사람들의 목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여성 사역자로 부르셨던 겁니다. 저는 우즈베키스탄에 돌아가서 여성사역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울 겁니다. 그곳에서 제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하고 성경을 가르칠 겁니다.
1996년 우즈베키스탄에 새 정부가 들어왔습니다. 새 정부는 크리스천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선교사들을 내쫓았습니다. 현재는 몇 명 안 되는 선교사들만이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을 위해 사역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예수님 믿기 아주 힘든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놀라우신 분이심을 믿습니다. 저의 나라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저의 남편의 사역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의 여성사역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저와 제 나라는 여러분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감사합니다.
본 사진은 기사와 관련이 없습니다.
워가2007 이향금 기자